[토요칼럼] 민생은 모르겠고, 나는 당선되고 싶어

입력 2023-12-15 17:53   수정 2023-12-28 13:47

‘경제 안보를 위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 기본법’(공급망 기본법)이 발의된 건 지난해 10월이었다. ‘제2의 요소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공급망안정화위원회를 정부 컨트롤타워로 설치하고 공급망안정화기금을 조성하는 내용을 담았다. 대표 발의자는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이었지만 딱히 여야 간 이견이 없을 민생 경제 법안이었다. 그런데도 정쟁에 밀려 1년 넘게 국회를 표류했다.

지난달부터 다시 불거진 요소수 문제가 인공호흡기 역할을 해줬다. 법안 처리를 촉구하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지난 7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무난한 통과가 예상됐다. 반대 의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국민의힘 소속 김도읍 법사위원장이 가결을 선포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A의원이 제동을 걸었다. A의원은 김병환 기획재정부 1차관에게 ‘왜 2021년 요소수 사태에도 불구하고 중국 의존도가 오히려 높아졌느냐’며 법안과 상관없는 내용을 한참 동안 따져 물었다. 보다 못한 김 위원장이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요소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법안은 일단 통과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섰다. A의원은 굳이 ‘민주당이 정략적으로 이러는 게 아니다’고 전제한 뒤 정부로부터 요소수 대책을 별도로 보고받는 조건으로 법안 통과에 찬성했다. 공급망 기본법은 이런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나마 공포 후 시행까지 6개월 기한을 둬 내년 하반기나 돼야 본격적으로 현장에서 효력을 나타낼 판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앞다퉈 ‘민생’을 외치고 있다. 거리에는 ‘민생 속으로’, ‘민생은 △△당’ 같은 현수막이 즐비하다. 비록 선거용 ‘반짝 이벤트’라고 해도 그나마 국민들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민생은 고달프다. 국민은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킬러문항’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개인이 파산 전 단계에서 신청하는 회생 건수는 올해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울 태세다. 9월까지 9만437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40.1% 급증했다. 금융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는 지난해 말 73만1400명에서 올 6월 말 77만7200명으로 6.3% 늘었다. 인터넷 대출 중개 사이트에는 대부업체에 불과 10만원, 20만원을 빌릴 수 있느냐고 문의하는 글이 즐비하다. 소액이라도 대출받지 못하면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들이다. MZ세대 사이에서는 ‘점심은 삼각김밥과 콜라, 저녁은 초코파이랑 컵라면으로 때웠다’는 식의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이다.

이런 와중에 야당은 정부 발목 잡기에, 여당은 야당 못지않은 포퓰리즘 행보에 골몰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 이후 경제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규제 혁신 법안 222건 중 지금까지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91건(41.0%)에 그친다. 대형마트의 휴일 온라인 배송을 허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등 계류 법안 대부분이 야당 반대에 막혀 있다. 민주당은 대신 중소기업 협동조합의 경성담합을 합법화하는 중소기업협동조합법 개정안 등 반시장적인 법안들을 밀어붙일 태세다.

총사업비 11조300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달빛고속철도(대구~광주 고속철도) 같은 지역 수혜성 사업엔 여야가 의기투합하고 있다. 동일 노선을 오가는 광주대구고속도로의 하루 통행량이 전국 고속도로 평균 통행량의 절반 이하인데도 말이다.

민생 법안을 가로막으면서 민생을 외치는 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이다. 달빛고속철도를 추진할 예산이 있다면 차라리 개인회생자나 신용불량자의 재기를 돕는 게 민생에 도움이 된다. 민생을 표방하는 현수막에 쓸 돈을 기부로 돌린다면 유권자에게 보다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살고 싶어’ 같은 현수막은 오히려 국민에게 스트레스다.

얼마 전 찾아간 서울의 한 주유소 직원은 ‘요소수 재고가 떨어졌다’는 말에 격분한 트럭 운전기사에게 멱살을 잡혔다고 토로했다. 중국이 요소에 이어 화학비료 원료인 인산암모늄도 수출을 제한하면서 농가에서는 ‘비료 대란’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공급망 기본법의 발목을 잡았던 의원들은 이런 현장의 상황을 알고 있을까. 트럭 운전기사가 진심으로 멱살을 잡고 싶었던 건 어쩌면 ‘민생은 모르겠고, 나는 당선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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